사르트르의 실존주의로 본 AI 시대: 인공지능은 우리처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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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나를 만들어간다"
요즘 뉴스만 틀면 인공지능(AI)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심지어 우리와 대화까지 나누는 똑똑한 기계를 보며 "나중엔 기계가 사람 노릇을 다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철학의 거장인 장 폴 사르트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일단 세상에 태어난 뒤에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해 나가는 유일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짜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AI도 우리처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만들어진 목적이 있는 기계"와 "목적 없이 태어나 자유로운 인간"
우리가 쓰는 가위나 스마트폰은 처음부터 '무엇을 베기 위해', '통화를 하기 위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집니다. 이를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합니다.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기능을 가졌어도, 결국 프로그래머가 넣은 데이터와 수학적 계산법이라는 틀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즉, AI는 정해진 정답을 향해 달려가는 '정교한 계산기'일 뿐입니다. 반면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용도가 없습니다. 내일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텅 비어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AI와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둘째, 마음의 울림과 스스로 느끼는 '불안'의 유무
사르트르는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하니 그 무게가 무거운 것이지요. 하지만 AI는 밤새 고민하며 잠 못 이루지 않습니다. 슬픈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실제로 슬픔을 느끼지는 못하며, 내일의 선택을 앞두고 가슴 떨리는 긴장을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AI에게는 '나'라는 주관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처럼 말해도 그 속에는 '자신을 의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고귀한 특권입니다.
셋째, 책임을 지는 태도와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앙가주망(사회 참여)'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린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AI가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기계가 도덕적인 죄책감을 느끼거나 감옥에 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책임은 기계를 만든 사람이나 사용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며 관계를 맺는 것도 '인격'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AI는 우리를 분석할 수는 있어도, 우리와 마음을 나누며 삶을 함께 짊어질 '실존적 동반자'는 될 수 없습니다.
결론: 기계의 시대, 다시 인간의 '자유'를 생각하며
결론적으로 사르트르의 눈으로 본다면, AI는 아무리 똑똑해져도 우리와 같은 '실존적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AI는 계산된 결과물(본질) 속에 갇혀 있지만, 우리는 매 순간 정해진 틀을 깨고 나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이 많은 일을 대신해 주는 이 편리한 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우리만의 '선택할 권리'를 되새겨야 합니다. 기계가 주는 정답에 내 삶을 맡겨버리는 것은 사르트르가 경계했던 '자기기만'에 빠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의 선택이 무겁고 소중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내리는 아주 작은 선택 하나가 AI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소중한 인간의 증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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