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겪는 '존재의 구토': 사르트르의 소설에 투영된 실존적 불안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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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의식의 불안정한 핵심
장 폴 사르트르의 1938년 첫 소설 구토(La Nausée)는 단순한 소설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 철학의 핵심적인 교리들을 내장 깊숙이 파고드는 문학적 탐구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문턱에서 출판된 이 소설은 20세기를 정의했던 혼란, 무의미함, 그리고 **급진적인 자유**에 대한 커져가는 감각을 포착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역사학자 앙투안 로캉탱(Antoine Roquentin)은 가상의 프랑스 도시 부비유(Bouville)에 거주하며, 존재 자체의 본질에 대한 일련의 불안정한 깨달음을 마지못해 목격합니다.
'구토'는 소설의 핵심 은유입니다. 사물들의 순전한 **우연성**과 **과잉성**을 직면할 때 로캉탱을 압도하는 만연하고 메스꺼운 감각입니다. 이는 실존주의적 만성 불안과 같습니다. 인간의 의미와 목적이 벗겨진 세계가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 발현입니다. 로캉탱의 여정은 현대인이 필연적으로 **부조리**와 마주하는 과정이며, 고정된 정체성과 신성한 질서라는 위안적인 환상을 벗어던지도록 강요합니다. 이 글은 구토가 현대 인류가 경험하는 심오한 실존적 불안을 어떻게 해부하는지, 특히 우연성, 부조리, 그리고 사르트르 초기 사상의 핵심에 놓인 '정당화'를 향한 절박한 탐색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할 것입니다.
2) 본문: 로캉탱의 실존적 위기 해부
2.1. 우연성과 과잉성의 충격
로캉탱의 위기는 처음에는 전혀 해롭지 않아 보이는 마주침—매끄럽고 젖은 조약돌, 끈적거리는 비누 조각, 혹은 공원의 밤나무 뿌리—에서 촉발됩니다. 이 사물들은 이름, 기능, 관습적인 의미가 벗겨진 채 갑자기 날것 그대로의, 여과되지 않은 존재로 나타납니다. 로캉탱은 그것들이 완전히 **우연적**(*contingence*)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들은 존재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고, *그렇게* 존재해야 할 필요성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근거 없이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이 깨달음이 바로 구토의 본질입니다. 세계는 분화되지 않은, 무시무시한 덩어리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로캉탱 자신을 포함하여—은 *de trop*, 즉 **과잉**입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필요하지 않다.'... 나는 단지 과잉일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막연히 느꼈지만, 그것은 끔찍했다. 이것은 열등감의 환영적인 인상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지만, 내가 멈출 수 없는 바로 이 존재, 이 실존의 문제였다."
우연성의 충격은 인간이 질서를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립니다. 사회는 세상을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경직된 범주(이름, 역사, 역할)를 부과하려 하지만, 구토는 이 질서가 순수한 날것의 존재(*l'être en-soi*, 즉자)라는 혼란스러운 현실을 덮고 있는 취약하고 임의적인 외피임을 드러냅니다. 크고 검은 밤나무 뿌리는 오직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이 야만적인 우연성의 궁극적인 상징이 되며, 로캉탱을 어떤 것도 필수적이지 않고, 어떤 것도 본질적이지 않으며, 우리의 삶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임의적이라는 소름 끼치는 깨달음으로 압도합니다.
2.2. 정당화의 실패: '독학자'와 자기기만(나쁜 신념)의 추종자들
존재의 무서운 우연성에 직면하여,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은 필사적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정당화**의 원천—필연적인 이유—을 찾으려 합니다. 사르트르는 부비유의 두 주요 인물 유형을 통해 이러한 시도를 설명하며, 이들은 **자기기만(*Mauvaise Foi*, 나쁜 신념)**의 형태를 구현합니다.
- 독학자 (L'Autodidacte): 이 인물은 추상적인 휴머니즘과 축적된 지식을 통해 필연성을 부과하려 합니다. 그는 지식, 특히 알파벳 순서대로 책을 읽어 나가는 방식(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삶에 본질적인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추상적인 이상(인류애)에 대한 그의 헌신은 그 자신의 구체적이고 우연적인 존재와 그가 내려야 할 필연적인 선택으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그는 보편적인 시스템 뒤에 숨어 개인의 자유를 회피하려 합니다.
- 부르주아 초상화 (과거): 시립 박물관에 걸려 있는 부비유 시민들의 초상화는 그들의 역할—시장, 사업가, 존경받는 숙녀—이 태어날 때부터 그들의 **본질**인 것처럼 살았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기대에 엄격히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굳혔고, 자신들의 과거 행동이 존재할 권리와 필연적인 정체성을 부여했다고 믿었습니다. 로캉탱은 이것이 자유를 부정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임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기능에 의해 정의된 대상(*en-soi*)인 척했으며, 자유로운 주체(*pour-soi*)임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회고적인 정당화를 추구했지만, 구토는 이러한 고정된 정체성을 자기기만적인 환상으로 드러내며 파괴합니다.
로캉탱에게 이러한 정당화 시도는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어떤 외부적 원천—책이든, 역사든, 사회적 역할이든—도 결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토는 바로 **정당화 *없이* 선택해야 한다**는 실존적 깨달음입니다. 현대인의 불안은 이 실패, 즉 급진적 자유를 포용함으로써 진정으로 살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비롯됩니다.
2.3. 허구적 창조로서의 주체성: 구토를 넘어선 길
그러나 로캉탱의 여정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주저하는 형태의 해방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의 거짓된 확실성과 타인의 고정된 정체성을 파괴한 후, 그는 자신의 **주체성**이라는 날것의 재료만을 남깁니다. 존재가 우연적이고 부조리하다면, 의미를 도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를 통해서입니다.
소설의 끝 무렵, 로캉탱은 재즈 음악(특히 "Some of These Days")을 듣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구토를 멈추게 합니다. 그는 그 선율이 인간의 창조물로서 날것의 존재가 결여된 일종의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음표들은 일정한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구성은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이 미학적 깨달음은 우연성의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삶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개인은 작고 자족적인 의미의 주머니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후기 윤리적 요구의 문학적 전조입니다. 주체는 자신의 급진적 자유를 받아들이고 진정한 **기획**에 헌신해야 합니다. 로캉탱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이는 역사 연구와 달리 과거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창조*하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따라서 구토는 최종적인 절망 상태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살았던 삶(자기기만)에서 진정하고 의식적인 창조(자유) 속에서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고통스럽고 필수적인 과도기입니다. 현대인의 과제는 부조리의 충격을 흡수하고, 의도적이고 책임감 있는 발명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3) 결론: 부조리한 기획을 포용하며
구토는 현대 시대의 **실존적 불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텍스트로 남아 있습니다. 로캉탱의 눈을 통해 사르트르는 방향 상실과 불안이라는 감정이 세계의 내재적 **부조리**와 우리 자신의 **급진적 자유**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임을 드러냅니다. 제목 속의 감각은 진정한 자각의 대가로 지불되는 심리적 비용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우리의 가치를 창조하고 우리의 존재를 정의하는 데 홀로 있다는 고통스러운 인식입니다.
모든 것의 우연성과 회고적 정당화의 실패를 폭로함으로써, 사르트르는 독자들에게 고정된 본질의 안락함을 버리고 그들 자신의 *pour-soi*의 무서운 무게를 포용하도록 강요합니다. 구토를 넘어선 여정은 실존주의적 명령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미를 발견함으로써가 아니라, 의식적이고 진정하며 책임감 있는 행동을 통해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존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목적의 부재와 영원히 씨름하는 현대인은 로캉탱의 최종적인 결심 속에서 자기 정당화라는 그들 자신의 기획을 시작할 근본적인 힘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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