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죽음 : 유한한 삶 속에서 가치 있는 의미를 창조하는 기술

안녕하세요. 오늘은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생각을 빌려, 우리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고민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주 현실적인 조언입니다. 1. 서론: 텅 빈 도화지 위에 던져진 우리들의 자유 살다 보면 문득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 인생의 정답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아주 명쾌하고도 서늘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정해진 정답(본질)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 도화지처럼 이 세상에 툭 던져진 존재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고 표현했습니다. 만들어질 때부터 용도가 정해진 가위나 볼펜과 달리, 사람은 먼저 태어난 뒤에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해 나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자유에는 '죽음'이라는 한정된 기간이 있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강력한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2. 본문: 유한한 삶을 가치 있게 채워가는 세 가지 지혜 ①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주는 삶의 리듬 사르트르에게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기보다,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를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허무한 사건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더 이상 내 삶을 설명하거나 수정할 수 없고, 오직 남겨진 사람들의 평가에만 맡겨지게 됩니다. 이 사실이 무섭게 들릴 수도 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아주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언제 찍힐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에 잘해야지'라며 삶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막연한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

하이데거의 '존재'와 사르트르의 '무': 두 거장의 실존 철학 비교 분석

20세기 철학의 지형도는 두 명의 거인, 마르틴 하이데거와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해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실존주의'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묶어 부르곤 하지만, 사실 그들의 출발점과 지향점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온 저와 같은 이들에게,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사르트르의 '무(Néant)'를 비교하는 일은 단순한 학문적 유희가 아닙니다.

특히 저처럼 평소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 사물의 끈적한 존재감을 목격하고, 『말』을 통해 언어와 행동 사이의 괴리를 고민하며 살아온 이들에게, 실존주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삶의 양식'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우연히 던져졌으나, 스스로 본질을 창조한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해주며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해줍니다. 


1. 서론: 존재론적 분기점과 주체적 삶의 시작

두 거장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역작 『존재와 시간』에서 망각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그에게 인간은 '현존재(Dasein)', 즉 세계라는 구조 속에 이미 깊숙이 박혀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 사르트르는 인간을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Nothingness)'로 정의합니다. 제가 사르트르의 삶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아무런 설계도 없이 세상에 나왔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습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 속의 한 부분으로 보려 했다면, 사르트르는 인간을 그 세계를 부정하고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 보았습니다.


2. 본문: 실존의 세 가지 핵심 비교와 나의 실천

I. 현존재의 사실성과 사르트르식 '본질의 창조'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개념은 우리의 '피투성(Thrownness)'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환경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구토』 속 주인공 로캉탱이 깨달았듯, 사물의 본질은 정해져 있을지언정 인간의 본질은 비어 있습니다. 저는 이 텅 빈 공간을 '나만의 선택'으로 채워나가는 삶을 지향합니다. 사회가 정해준 역할이나 운명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 않고, 매일 아침 "나는 오늘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사르트르에게 배운 실존적 주체성입니다.


II. 결단적 기투와 '자기기만'에 맞서는 용기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삶이란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고 역사적 상황 속에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Bad Faith)'을 경계하는 데 더 큰 무게를 둡니다. 우리는 흔히 "어쩔 수 없었다"거나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말』에서 사르트르가 자신의 지적 허영을 처절하게 해부했듯, 저 역시 제 삶의 모든 순간이 오직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려 노력합니다. 본질이 없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기투(Project)해야 하는 운명, 그것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무한한 해방감을 줍니다.


III. 불안을 넘어선 실존적 연대와 책임

불안(Angst)은 두 철학자 모두에게 진리로 가는 관문입니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이 죽음을 자각하게 한다면, 사르트르에게 불안은 '나의 선택이 인류 전체의 모델이 된다'는 엄중한 책임감에서 오는 현기증입니다. 저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로서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허무에 빠지는 대신, 오히려 그렇기에 내가 만드는 모든 가치가 소중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입니다. 나의 자유를 선택하는 행위가 타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행위와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실존은 파편화된 개인을 넘어 위대한 인본주의로 나아갑니다.


3. 결론: 스스로 본질을 조각하는 삶의 경이로움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결국 '인간을 무엇이 규정하는가'에 대한 싸움입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계라는 뿌리에 닿아 있음을 강조하지만, 사르트르는 그 뿌리마저 박차고 날아오를 수 있는 '무(無)'라는 날개를 우리에게 쥐여주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사르트르의 책장 사이에서 발견한 그 날개를 펴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가르침은 제 삶의 가장 엄격한 계율이자 가장 자애로운 위로입니다. 세상이 정해준 정답은 사라졌고, 우리는 우연의 숲을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을 조각해 나가는 주체적인 삶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의 허무를 돌파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라 확신합니다.